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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보다

[책] 계속해보겠습니다

러기- 2022. 10. 5. 17:34
<계속해보겠습니다>
 

계속해보겠습니다

2014.10.31

황정은/창비

 
작은 풀은 작아서 작은 잎을 내민다. 작은 이파리 하나 더 펼쳐 무성해진다. 작은 땅을 딛고도 푸르다. 약해서 약한 꽃을 피워낸다. 노랗게 빨갛게 본디의 색을 잊은 적이 없다. 조각 햇볕으로 선명하게 피워낸다. 밟혀도 싹을 틔워낸다. 돌에 짓이겨지면 깨진 대로 일어난다. 흙에 묻히면 흙을 밀고 올라온다. 작아서 상처가 깊고, 약해서 아픔이 무겁다. 팬지처럼 화려한 꽃을 피우거나 측백나무처럼 큰 나무가 되는 꿈을 꾸는 것 같지는 않다. 그래도, 빛 나는 날, 흐린 날 다 지나며 한 삶을 살아낸다.
 
소라, 나나 자매와 나기라는 이름을 가진 세 사람이 각자의 입장에서 풀어놓는 삶의 이야기다. 셋은 같은 공간에서 자라났다. 이름이 본래 의도한 바와 다르게 지어지고 풀이된다는 점이 비슷하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 이름을 선택할 수 없다. 풀이도 다분히 부르는 사람의 몫이다. 삶이 늘 내 맘 같지 않다는 점에서 이름과 운명은 동질의 것인가 싶기도 하다. 아주 어려서 아버지를 잃었다는 공통점도 있다. 이 또한 그들의 선택은 아니지만, 이후의 삶의 궤적에 매우 직접적이고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들의 삶은 썩 변변치 않은 쪽으로 기울었다. 
 
그런 삶을 직접 살아내는 당사자 소라, 나나, 나기에게 초고화질 카메라를 들이댄 것처럼 작가는 이들의 삶을 세밀하고 생생하게 그려낸다. 삶을 채워가는 만남과 사랑과 다툼과 그리움을 초고속 카메라로 담아 슬로우모션으로 보여준다. 콧잔등에 송골송골 맺히는 땀방울과 미세하게 흔들리는 눈동자와 미묘하게 실룩이는 입가의 근육까지 세밀하게 적나라하게.
 
창비는 이것을 '처연하게 아름다운 세계'라고 했다. 처연한데 아름답다고? x소리. 속으로만 생각하고 소라는 별 말은 하지 않을 것 같다. 나기도, 웃음인지 코웃음인지 모를 만큼만 반응하고 대꾸는 하지 않았겠다. 아름다우면 네가 살아보든가, 라고 나나라면 한마디는 했을 것 같다. 그뿐, 이들은 어디에 도달하겠다 든가 어떤 사람이 되겠다는 꿈을 말하지 않는다. 삶의 의미랄지 목적에 대해서 의문하지 않는다. 그게 무엇이 되었든, 삶을 계속할 뿐이다. 
 
계속해보겠습니다, 라는 말은 구조상 능동적인 선언임이 분명하다. 멈추지 않고 내가 하던 것을 이어가 보겠다는, 그것이 중요한지, 하찮은지, 좋은지, 나쁜지에 관계없이 다시 해보겠다는 나의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계속해보겠습니다, 그리고, 이 말보다 지독하게 수동적일 수도 없다. 실패했다, 하찮다, 나쁘다, 작고 볼품없다, 그럼에도 그 삶을 이어가 보겠다고, 다시 해 보겠다고 한다. 하찮음을 바꾸겠다 하지 않고, 작고 볼품없음을 크고 멋지게 키우겠다 하지 않는다. 인생이 원래 그렇다는 체념도 아니다. 그러니 '계속하겠다'는 말은 굳센 의지로 들리기도 하고, 계속해 '보겠다'는 체념적이고 수동적인 독백으로 들리기도 한다.
 
성공, 달성, 완수, 획득, 성장, 도달을 쫓지 않는 삶, 그런 삶에도 밀려 드는 사랑, 상실, 그리움, 미움에 젖어가며 계속 걸어간다. 삶은 어쩌면 신비하고, 어쩌면 구차하고, 어쩌면 불편하고, 어쩌면 아름답다./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