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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재감시원 코니윌리스 걸작선1>

리알토에서

단편소설, 1989 

At the Rialto by Connie Willis

<화재 감시원, 코니윌리스 걸작선1 - 아작> 중에서

 

<< "사고의 진지함은 뉴턴 물리학을 이해하는 데 있어 하나의 전제조건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러한 진지함이 양자이론을 이해하는 데에서 걸림돌이 된다고 확신합니다" - 1989년 국제양자물리학회 연례회에서 게단켄 박사의 기조연설 중 발췌, 캘리포니아, 할리우드>>

시작부터 만만치 않다. 엄청난 과학 메니아에 엄청난 이야기꾼인 것은 알겠는데, 양자이론이라니, 감당할 수 있을까? 아무래도 다음 이야기로 살짝 건너뛰는 것이 좋지 않을까. 그렇지 않아도 멈칫거리고 망설여지는데, 한 장을 넘길 때마다 양자역학(으로 보이는 이론)이 한 뭉텅이씩 쌓여 있다. 자세히 들춰보기에는 부담스럽고 밟고 지나가자니 아쉽다. 이거 진짜 과학 이론인가? 몇 번 읽어봐도 딱히 이해가 안 된다. 글의 맥락상 왜 이 이론을 여기에 붙여놓았는지도 모르겠다. 구글링을 해보다가 자꾸 맥이 끊겨서 포기. 게다가 끊임없이 새로 나오는 박사들은 실존 인물인가? 강연 발췌문에 따르는 이름도 구글링 하다가 포기.

양자이론이라니, 차라리 그냥 과학자를 하시지 그랬어요. 솔직히 전 그닥 관심 없거든요. 아무래도, 이만 가볼게요. 그만 넘기려는데, 작가는 팔꿈치로 툭툭 치고는 이죽거리며 썩 앞서간다. 일단 따라와 보라는 거다. 이를테면 양자이론을 알아먹기 쉽게 설명하기 위한 모델을 찾고 있다는데. 이론의 대부분은 이해가 불가능하다고 스스로 결론 내려놓고서는 설명 모델을 찾는다고? 그러니까 양자이론이 어렵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군요. 엄, 굳이 이렇게 길고 복잡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어려운 거 잘 알고 있습니다. 이제 됐죠? 이만 가볼게요. 뭘 그리 정색하고 그래. 작가는 아예 옆구리를 꼬집는다. 양자이론을 설명하려는 것은 확실히 아닌 것 같다.

학회는 헐리우드에 위치한 리알토 호텔에서 열리고 있고 전국에서 몰려든 박사가 자갈밭 돌멩이처럼 발에 채인다. 잡다한 재밋거리로 달뜬 헐리우드 거리에서 진지하고 엄격한 양자물리학회는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좀처럼 섞이지 않을 것 같은 두 주재 사이를 양자물리학자들이 신경질적으로 넘나든다. 배우 겸 모델이 직업인 호텔 직원과 캐서린 헵번이 만들어주던 와플과 고전영화를 상영하는 극장과 배우들의 손도장 사이 사이에 파동/입자 이중성과 프랙탈과 높은 엔트로피 상태와 지연 선택실험 따위가 놓여있다. 보기에 따라 절묘한 장치 같기도 하고 장애물 같기도 한.
 
단편소설인데도 긴 여행을 한 기분이다. 양자물리학을 찾아 헐리우드 거리를 헤맸으니, 그럴 만도 하지. 다행스러운 것은 이 여행의 가이드가 엄청난 과학 마니아에 재미있는 이야기꾼이라는 점. 양자물리학 이론과 헐리우드 고전 영화 제목이 낮설다하여 머뭇거릴 필요는 없다. 어차피 여행은 낯선 만큼 흥미로운 거니까. 여기에 코니 윌리스 같은 유능한 가이드가 있다면, 한 번 다녀올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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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코니 윌리스의 걸작 SF를 모은 단편 소설집이다. 리알토에서, 나일강의 죽음, 클리어리 가족이 보낸 편지, 화재 감시원, 내부 소행 - 다섯 편의 이야기가 있다. 풍부한 과학적, 역사적 배경을 토대로 풀어내는 이야기라서 쉽게 집중할 수 있다. 단단하고 무거운 소재도 있지만, 수다스러운 전개와 곳곳에 묻어 놓은 냉소적인 유머로 어쨌거나 끝까지 경청하게 한다. 천부적인 이야기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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