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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를 모르는 멋진 문장들 - 원고지를 앞에 둔 당신에게

 

금정연, 2017.6.2
서평집
 
목차가 한 편의 시 같다. 계속 읽어보니, 시는 아니구나. 아니, 정말 시일수도 있다. 시라는 게 대부분 그렇지 않은가, 호락호락하게 맥락을 보여주지 않는. 책 제목이 '실패를 모르는 멋진 문장들'인데, 하물며 목차에 쓸 문장을 낭비했을 리가 없다. 제련하고 정선하여 뽑은 제목을 절묘하게 배치하여 은근하게 드러내고픈 서사가 있는 것이 분명한데...
 
1부 삶과 문장 사이에서
       나는 실패한다 / 그러는 동안에도 나는 한 구절을 떠올렸다 / ...
 
2부 독자와 작가 사이에서
       귀를 가진 사람의 할 일 / 제발 조용히 좀 해요 / ...
 
 
작가는 활자유랑자, 생계형 독서가를 자처한다. 활자유랑자가 뭐지? 일정한 거처 없이 떠돌아다닌다고, 활자에서 다른 활자로, 활자와 활자 사이를. 한 번에 쓴 책이 아니고, 오랜 세월에 걸쳐 잡지 등에 기고한 서평을 모아서 엮어낸 책이다.
 
1.    당황했다 - 서평집이었어?

[실패를 모르는 멋진 문장들]이라는 제목이 물리적으로는 훨씬 크게 박혀 있는데, 왜 [원고지를 앞에 둔 당신에게]라는 부재가 더 먼저 내 눈에 들어왔을까. 그래서 글쓰기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책을 집어 들었다. 어, 서평집이다. 서평집이 어때서? 그러니까, 서평집이 어때서...
 
요즘 TV를 보면 연예프로그램 일색이다. 음식, 오락, 여행, 낚시, 개인사 등 주재도 형식도 다양하다. 아무 때나 TV를 켜면 채널의 절반 정도는 이런 프로그램인 듯 하다. 무심코 보는데 좀 의아하게 여겨지는 대목이 눈에 띈다. 패널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자리에 앉아서 TV를 보는 장면이다. 그들은 나란히 앉아서 TV로 자신들이 혹은 다른 연예인들이 출연한 내용을 보며 웃고, 놀라고, 울고, 탄식하고 토론도 한다. 그들이 TV 보는 장면을 나는 TV로 보고 있다. 
 
이게 한 번 눈에 들어오니까, 다른 많은 연예프로그램 또한 그렇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연예인들이 음식을 먹고, 게임을 하고, 여행하는 것을 TV로 보면서 군침을 삼키고 부러워하고 감동하는 연예인을 나는 TV로 본다. 다시 말해 TV로 TV시청을 시청하는 것이다. TV를 볼 때 원래는 자유로웠던 내 감상을 패널의 모범 감상틀에 넣어 성형하는 기분이다. 나는 안 웃긴데, 패널들은 배꼽을 쥐고 웃는다. 나는 먹고 싶지 않은데, 패널들은 환호하며 침을 삼킨다. 나는 화가 나는데, 패널들은 감동한다. 그러다 보니 TV로 TV시청을 시청하는 것이 불편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비슷한 관점에서, 서평집은 책에 대한 감상을 가이드하는 경향이 있다. 이해와 감동의 방향을 강제당하는 것 같다. 어떤 서평은 책 본문보다 장황하고 어렵기까지 하다. 너는 이 책에서 그거밖에 못 봤지? 라고 윽박 한다. 그래서 읽을 책도 많은데 굳이 서평집을 읽어야 하나? 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어째거나, 결국엔, 이 책을 다 읽고 이렇게 서평집에 대한 서평을 쓰고 있다. 서평이라고 하기 쑥스러우니, 서평에 대한 독후감을 쓰고 있다고 하자.
 
2.    황당하다 - 내가 읽은 책이 한 권도 없어

세상엔 책이 많다. 검색해 보니 2020년 현재 세상에는 129,864,880권의 책이 있다고 한다. 이 중에 나는 몇 권의 책을 읽었을까? 만분의 일, 십 만분의 일? 읽은 책의 숫자 대비 읽지 않은 책의 숫자가 비할 수 없을 만큼 크므로, 임의로 집어든 한 권의 서평집 목차에 내가 읽은 책이 하나도 없을 확율은 매우 높다. 그럼에도 황당한데? 삼국지와 수호지는 읽었는데, 서점가에서 좀 뜬다는 책은 (뜨문뜨문) 챙겨 읽었는데, 이 서평집에 나오는 책의 제목은 하나같이 낯설다. 도대체 어떤 기준으로 선정한 책들일까. 혹시, '당신들은 절대 안 읽었을 책'이나, '들어보지도 못했을 책'을 일부러 고른 것은 아닐까, 라는 의심도 해 본다. 
 
안다. 이 황당함이란, 독서량이 빈한함을 직시하고 싶지 않은 일종의 몸부림 같은 거다. 궁색하게 변명을 하자면, 내가 읽은 책이면, 내가 아는 책이면, 활자유랑가겸 생계형 독서가의 서평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텐데, 나의 감상을 비교해보는 재미도 있을 텐데, 제목마저도 처음 접하는 책들이라서 아쉽다는 말이다. 
 
*2020년 현재 존재하는 책의 숫자에 대해 꽤 많은 블로그와 기사가 위의 숫자를 인용했다. 좀 더 자세히 검색해보니 구글데이터가 2010년에 만들어낸 숫자였다. 블로그와 기사를 쓴 사람들이 연도만 바꿔가며 10여 년 동안 같은 숫자 인용하고 있다. 지금은 1억 4천만쯤 되려나? 1억 2천 9백만이나 1억 4천만이나, 태평양이나, 대서양이나... 
 
3.    화가 난다 - 책이 이렇게 얇아?

읽어본 적 없는 책에 관한 이야기인데, 재미있다. 특히 작가가 첫 문장에 대해 보인 애착 혹은 집착 혹은 고착은 활자유랑자의 움푹한 발자국을 보는 듯 인상적이다. 지금까지 읽은 대부분의 비평 혹은 서평은 책의 원문보다 장황하고 어려웠다. 하지만 이 책은 그렇게 힘들게 읽을 필요가 없을 듯하다. 물론, 작가가 더 깊이 묻어 놓은 더 깊은 뜻에는 내가 미처 닿지 못했을 수도 있다. 수용성 비타민처럼 미처 소화 흡수하지 못하는 성분은 배출되므로 굳이 거기까지 신경 쓸 것 없다. 책에 대한 자세한 안내와 길잡이도 없다. 서평을 읽고 나서도 책이 처음 들어본 제목으로 남는다. 
 
책은 술술 읽혀 금세 절반이 지났다. 절반밖에 남지 않았다. 하루에 두 꼭지씩만, 아껴서 읽기로 한다. 그런데도 한 번 잡으면 세 꼭지, 네 꼭지가 금방 넘어간다. 절제하기 어렵다. 내가 의지력이 약하구나. 조금 짜증이 나기 시작한다. 한 번에 쓴 책도 아니고, 몇 년에 걸쳐서 여기 저기 기고한 서평들을 모아서 엮은 건데, 왜 이렇게 얇게 만들었을까. 참, 인심하곤... 그러다가 책이 끝날 무렵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이거 다 읽고 나면, 다시 읽을 수 있다.
 
조금 시간을 두고 두 번째 읽을 때도 여전히 처음 들어본 책에 관한 이야기이고, 그래서 여전히 재미있다. 그런데, 처음 읽을 때와 다른 한 가지 마음이 움트기 시작한다. 나도 이 책들을 읽어봐야겠다. -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