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소설, 2013년 7월 - 기억은 믿을 만 한가? 기억은 인상이나 경험에 관한 의식의 기록이다. 간혹 실제로 경험하지도 않고, 이를테면 꿈을 꾸거나 상상만 했는데도, 실제로 겪은 것처럼 생생한 기억으로 남는 수가 있다. 아내는 간혹 기분 나쁜 꿈을 꾸고 나면 나를 미워한다. 꿈에 남편이 바람을 피워서 너무 힘들었다고 한다. 드라마를 보다가 내게 눈을 흘기기도 한다. 드라마 속 남자가 여자 몰래 바람을 피우고 있다. 꿈속의 남편도, 드라마 속 남자도 나와는 관계없는 사람이라고 항변해도 소용없다. 그녀의 의식에는 '남편이 바람을 피운다'는 기록이 생겼다. 이런 것이 기억이다. 그런가 하면 실제 경험한 사건을 사실과 다르게 기억하는 수도 있다. 내 기억엔 분명 아내가 먼저 내게 접근했는..
그리고 신은 얘기나 좀 하자고 말했다 한스 라트 Und Gott sprach: Wir müssen reden! written by Hans Rath, 2012. 11.09 소설 신을 이해하고, 사람을 이해하고, 나를 이해하는 길 난 무신론자야. 단호하게 말하는 친구의 얼굴을 경외심을 가지고 바라본다. 무신론이란 '신은 없다.', 즉 어떤 의미로든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영적 존재가 없다는 '믿음'이다. 한밤에 홀로 공동묘지를 지나면서 자신도 모르게 으스스한 기분을 느끼게 되면 그 무신론은 부족한 믿음이다. 시험장에 들어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며 부디 잘 되기를, 가슴이 아프도록 기원하게 되는 것도 무신론으로는 갈 길이 한참이다. 잔인한 전쟁과 불의한 학살의 현장을 보면서 사람이 아닌 신을 원망하는 것은 ..
아이를 찾습니다. - 김영하 소설, 2014. 12 김영하 소설집 오직 두 사람 (2017) 중 - 소망을 잃은 채로 살아가는 법 세상 모든 것이 노랗게 보이고 온몸의 땀구멍이 한꺼번에 확 열리는 순간을 경험한 적이 있다. 사람들 북적대는 대형마트에서 아내와 내 사이에 있어야 할 아이가 보이지 않았다. 아이를 되찾기까지 불과 3~5분, 매우 짧은 시간이었지만 우리 부부는 절망의 늪을 이전에 상상해 본 적 없는 깊이까지 내려갔다 와야 했다. 한동안은 아이도 밤마다 경기를 일으켰다. 우리 부부는 그날의 기억을 정신적 외상 (PTSD)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도 10년쯤 지나고 나니 한 편의 추억이 된다. 외상이라고 불렀던 그 상처는 까만 멍에 불과했다. 멍은 시간이 길어지면 묽어지다 사라지고, 조금 더 시간이..
야성의 부름 - 잭 런던 The Call of the Wild by Jack London 소설, 1903 - 문명에서 야성으로 벅은 세인트버나드 종인 아빠의 큰 체구와 세퍼트 종인 엄마의 단단하고 날렵한 골격을 물려 받아 보기 드물게 크고 강인했다. 지금은 실리콘벨리로 잘 알려진 산타클라라 벨리에서 판사인 주인의 충직한 친구로, 또 커다란 정원의 지배자로 자부심과 위엄을 지니고 자랐다. 1897년 캐나다 유콘의 클론다이크 골드러시로 많은 사람들이 극지방으로 몰려들었다. 또한 많은 개들이 썰매를 끌기 위해 따듯하고 유복한 남쪽지방을 떠나 북으로 끌려 가야 했다. 귀족 같은 삶을 살던 벅도 정원사의 배신으로 북극지방으로 가게 된다. 이 과정에서 벅은 생애 처음으로 모진 학대를 당하고 굴종을 배운다. 추위와 ..
밀레니엄 스티그 라르손 Millennium by Stieg Larsson 눈앞이 흐릿하다. 여기가 어디지? 답답하게 덮고 있는 것들을 떨쳐내려는 듯 머리를 한 번 세차게 흔들었다. 시력이 서서히 돌아온다. 아, 여기는 ... 우리집이잖아? 그리고 나는 거실 식탁에 앉아 있다. 그런데 아내가 보이지 않는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아이들은? 후다닥 방문을 열어 보니 어둑어둑한 방에 아이들이 쓰러져 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기억을 더듬어 본다. 에게해 (Aegean Sea)가 내려다 보이는 지브롤터 해안, 총격에 아수라장이 된 스톡홀름의 카페, 천재 헤커들의 해방구, 보안회사, 정보기관, 칼끝 위에서도 자부심 하나로 버티어 내는 작은 잡지사 밀레니엄의 사무실, 영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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