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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찾습니다. - 김영하

소설, 2014. 12

김영하 소설집 오직 두 사람 (2017) 중

 

- 소망을 잃은 채로 살아가는 법

 

세상 모든 것이 노랗게 보이고 온몸의 땀구멍이 한꺼번에 확 열리는 순간을 경험한 적이 있다. 사람들 북적대는 대형마트에서 아내와 내 사이에 있어야 할 아이가 보이지 않았다. 아이를 되찾기까지 불과 3~5분, 매우 짧은 시간이었지만 우리 부부는 절망의 늪을 이전에 상상해 본 적 없는 깊이까지 내려갔다 와야 했다. 한동안은 아이도 밤마다 경기를 일으켰다. 우리 부부는 그날의 기억을 정신적 외상 (PTSD)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도 10년쯤 지나고 나니 한 편의 추억이 된다. 외상이라고 불렀던 그 상처는 까만 멍에 불과했다. 멍은 시간이 길어지면 묽어지다 사라지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멍 난 곳이 팔뚝이었는지 어깨였는지조차도 헷갈리게 된다. 그때의 이야기를 하며 기꺼이 하하 호호 웃을 수 있다. 하지만 10년 전 그날에 아이를 되돌려 받지 못했다면... 나는 그런 상황을 차마 상상조차 해 본 적도 없다.

 

소설은 평범하고 평화로운 날에서 시작한다. 여름, 토요일, 프로야구, 마트, 세일, 카트, 아내, 그리고 아이. 악 소리라도 내지르고 싶을 만치 지루한 일상의 반복이었다. 하지만, 그날은 마지막으로 그런 날이기도 했다. 윤석과 미라는 그날 마트에서 막 두 돌 지난 아들 성민을 잃었다.

 

먼저 그들의 신분이 바뀌었다. 대기업 회사원이었던 윤석과 서점 직원이었던 미라는 그날부로 '실종된 성민이 아빠, 실종된 성민이 엄마'가 되었다. 직장을 그만두고 '아이를 찾습니다'라는 전단을 돌렸다. 아이를 찾는 일이 신분이고 직업이고 소명이 되었다. 가세는 금방 기울었다. 아이와 함께 살던 햇빛 잘 들어오는 아파트를 팔고 언덕배기 무허가 건물에 있는 단칸방으로 이사를 했다. 엄마 미라는 조현병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윤석은 이 모든 불행과 불운이 아이를 잃은 데에서 온 것이라고 여겼다. 아이만 찾으면, 아이만 찾으면, 아이만 찾으면, 모든 것이 제 자리를 찾고 회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끝없이 기울어지고 내려가는 삶이었지만, 그 희망 하나로 11년을 살아 냈다.

 

어느 날, 아이가 돌아왔다. 아이를 잃을 때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징후나 예고도 없었다. 아이를 데려다 여태 키워온 여자가 자살했고 성민을 부모에게 돌려주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두 살 언저리에서 잃은 아이를 11년 만에 찾는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그러니 비록 실종자 유전자 정보 DB와 같은 첨단과학의 이기 덕분일지라도, 이것은 기꺼이 기적이라고 할 만했다.

 

그런데 11년 만에 돌아온 아이는 윤석이 그토록 목마르게 그리던 성민과 너무나도 달랐다. 코밑이 거뭇거뭇해지기 시작했고, 눈이 쭉 찢어진 데다 살이 쪄 배가 불룩했다. 욕심이 많고 성질도 급해 보였다. 무엇보다 이름부터가 성민이 아닌 종혁이었다. 윤석에게는 볼살이 토실토실하고 선하고 맑은 눈망울을 가진 성민이라는 아이가 있었다. 더는 기울어지지도 내려갈 수도 없는 바닥에서 오직 성민이를 찾는다는 한 가지 소망의 빛만을 바라봤는데, 이제는 그 소망의 빛이 현실로 내려왔는데, 윤석의 기억과 기대와는 너무 다른 애가 나타난 것이다.

 

자신이 종혁이라고 주장하는 아이의 학부모가 된 윤석과, 한순간에 홀어머니를 잃고 '유괴되었던 성민이'가 된 아이는 아빠와 아들로서의 자리를 쉽게 찾아내지 못한다. 지난 11년간 오직 '실종된 성민이 아빠, 엄마'라는 신분으로 살아온 윤석의 삶에 다른 변화는 없었다. 갑자기 홀어머니를 잃은 충격도 소화하기 힘든 어린 성민은 유괴되었던 아이라는 더욱 원천적인 절망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성민이 돌아왔음에도 엄마 미라의 조현병 증세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마치 정해진 길을 정해진 속도로 걸어가듯, 나빠지기만 했다.

 

비록 밑바닥에서의 삶이었지만, '성민이만 찾으면'이라는 희망은 하루하루를 버티어 내는 힘이었다. 더는 내려갈 곳도 없는 바닥이니까, 이 삶에 변화가 온다면 위로 가는 방향밖에 뭐가 더 있겠는가. 그래서 절망도, 불행도, 그 옛날 토요일에 프로야구를 보다가 억지로 마트에 끌려가던 날만큼이나 익숙해져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성민이가 돌아왔는데, 그래서 기적이라고 여겼던 이 초자연적 현상은 차라리 재앙에 가까웠다. 11년 전에는 아내와 서로의 부주의함을 놓고 원망하고 비난하고 싸우기 일쑤였지만 이제는 조현병세가 심해지는 아내를 탓하는 의미도 없다. 성민은 어떤가. 유괴될 때 불과 두 돌밖에 지나지 않은 아이에게, 그렇게 들려가서 홀어머니인 줄만 알고 자라온 아이에게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인가.

 

삶을 지탱하던 소망이 달성되었지만, 보상은 없었다. 바닥에 떨어진 삶은 바닥과 완벽하게 밀착해 늘어질 뿐, 소망이라는 것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한 것에 불과했다. 윤석은 그만 죽을 것을 결심한다. 무덤덤하게 죽기를 실행하려는 때에 아내 미라가 산에서 실족하여 죽었다. 바닥이라서, 더는 내려갈 일도 없었는데, 그 바닥마저 꺼졌다. 윤석은 상을 치르고 아들 성민과 함께 고향 시골로 내려갔다. 무허가 창고를 개조해서 주거지로 삼고 폐탄광에 표고버섯 농사를 짓는다.

 

폐광에서 짓는 버섯농사이다. 경제적 가치를 다한 폐광에서 경제적 가치를 다한 고목을 널고 버섯농사를 짓는다. 버섯은 볕을 소구하지도 풍부한 물과 영양을 소구하지도 않는다. 포자번식을 하는 버섯은 유려한 꽃을 피우지도 번식을 위한 사회도 소구하지 않는다. 경제적 가치를 다 한 통나무에서 나고 햇볕이 들지 않는 그늘에서 꾸역꾸역 살아낼 뿐이다. 모든 희망을 잃고 바닥마저 꺼져버린 그래서 생기를 잃은 고목과도 같은 윤석이 남은 생을 견디어내는 방식과 흡사하다. 중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에 들어간 성민은 어느 날 집을 나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밑으로 밑으로 꺼지기만 할 뿐 생기가 없던 이야기는 마지막에 힘겹게 한 토막을 더 토해낸다. 성민이 집을 나갈 때 함께 사라졌던 아랫마을 여자아이가 불쑥 나타나더니 갓난아이를 내려놓고 사라져 버렸다. 윤석이 갓난아기의 두 손을 마주 잡고 말똥말똥한 눈을 바라보며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꺼진 바닥이라도 살아내고 버티어내면 진짜 기적이 일어나는 것일까. 모든 희망을 떨구어내고 버섯이 자라나는 몸통이 되어서라도 서서 견디면 어느 봄날엔 여리고 파란 싹이 돋는 것일까.

 

이 소설을 읽는 동안 한 무리의 사람들이 생각났다. 2014년 4월, 가슴 깊은 곳에 외상을 입은 우리 말고, 실제로 자신의 살점과 심장을 베어내고 '유가족'이라는 원치 않는신분으로 살아 온 사람들 말이다. 작가는 이미 구상하고 있던 이야기를 이 사건을 보고 완성했다고 했다. '가슴 아프지만 산 사람은 살아야지'라며,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사는 것이 '일상'이고 '회복'이라고 표현했던 우리 사회의 모습을 이렇게 그려냈다.

 

'아이를 찾는다는 방송이 매장 안으로 벌써 세 번째 울려 퍼졌다. 반향은 없었다. 방목하는 양 떼처럼, 수백 대의 카트들이 매장 안을 평화롭게 소요하고 있었다. 미라는 그들 사이로 헤치고 들어가 소리치고 싶었다. 왜 아무도 방송을 듣지 않아요? 여러분도 아이가 있잖아요? 누구나 당할 수 있는 일이잖아요? 안 그래요?' -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