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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소설, 2013년 7월

 

- 기억은 믿을 만 한가?

 

기억은 인상이나 경험에 관한 의식의 기록이다. 간혹 실제로 경험하지도 않고, 이를테면 꿈을 꾸거나 상상만 했는데도, 실제로 겪은 것처럼 생생한 기억으로 남는 수가 있다. 아내는 간혹 기분 나쁜 꿈을 꾸고 나면 나를 미워한다. 꿈에 남편이 바람을 피워서 너무 힘들었다고 한다. 드라마를 보다가 내게 눈을 흘기기도 한다. 드라마 속 남자가 여자 몰래 바람을 피우고 있다. 꿈속의 남편도, 드라마 속 남자도 나와는 관계없는 사람이라고 항변해도 소용없다. 그녀의 의식에는 '남편이 바람을 피운다'는 기록이 생겼다. 이런 것이 기억이다.

 

그런가 하면 실제 경험한 사건을 사실과 다르게 기억하는 수도 있다. 내 기억엔 분명 아내가 먼저 내게 접근했는데, 아내는 내가 먼저 집적거렸다고 기억한다. 둘 중 하나는 경험에 대한 기억이 실제 발생한 사건과 다른 것이다. 시험 때 내가 아는 문제가 확실해서 자신 있게 답을 썼는데, 틀렸다. 잘 이해했는데 (입력), 다르게 기억한 것 (보관)을 써서 (출력) 틀린 것이다. 불안하고 못 미더운 기억이다.

 

그래서 우리는 기록 한다. 문자로 적거나 녹음을 한다. 하지만 사건과 기록 사이에는 인식과 기억이라는 중간 절차가 있다. 사건의 내용을 인식하고 기억에 임시든 영구든 저장을 해야 비로소 기록이 가능해진다. 이때 더 강하게 인식하고 선명하게 기억하는 것을 먼저 기록한다. 자신에게 유리한 것만을 강하게 인식하는 경향도 있다. 하루에 수천 개씩 쏟아지는 언론 기사를 보자. 같은 사건을 묘사하는 데도 기자에 따라 다른 기사가 나온다. 같은 기사를 읽어도 독자에 따라 달리 읽힌다. 그러니 이러한 기록의 가치도 불안하고 못 미더운 기억과 다를 바 없다.

 

사진과 영상을 어떤가? 작년 겨울 가족여행 때 찍은 사진 한 장을 보자. 그 사진 속의 인물들은 같은 한 장면을 보며 지난 여행의 추억을 떠올린다. 가족들과 함께 편안한 마음으로 낯선 거리를 걷는 즐거움, 햄버거 하나도 새롭고 색달랐던 식사, 유난히 파란 하늘과 대조를 이루며 잘 어울려 보였던 주황색 건물, 저마다 다른 인상을 기억해 낼 것이다. 그뿐인가, 누군가는 촘촘히 짜 놓은 일정을 챙기느라 늘 신경이 곤두섰던 기억을 떠올릴 수 있다. 다른 누구는 유난히 추웠던 날씨와 시차 때문에 차만 타면 정신없이 자느라 구경을 못 했다는 불평을 할 수도 있다. 물과 음식을 갈아먹느라 속이 불편했던 기억도 있다. 사진이 있으니 여행을 다녀왔다는 기록은 확정적이지만, 이 사진으로 소환할 수 있는 기억은 제각각이다. 사진도 매우 단편적이고 제한적인 기록이 될 뿐이다.

  

살인자의 기억, 이 소설은 나이 70을 먹고 치매에 걸려 서서히 기억을 잃어가는 노인의 기록이다. 그는 살인자였다. 25년 전 마지막 살인을 할 때까지, 30년간 취미로 사람을 죽였다. 그러니까 한때의 연쇄살인범이 25년이 지난 후 노인이 되어 치매에 걸리자 기억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쓰는 기록이다. 그에게는 피치 못할 사연을 가진 딸 은희가 있다. 딸 은희를 위해 25년 만에 다시 살인을 해야 할 이유가 생긴다.

 

자꾸만 흐릿해지는 기억, 하루 지나면 또 한 꺼풀 벗겨나갈 기억을 지키기 위한 기록이다. 감출 이유가 없고, 복선을 깔 여유도 없다. 내용은 직설적이고 문장은 간결하다. 겨우겨우 써내는 만큼 문단도 짧다. 그래서 소설은 술술 읽힌다. 멈칫거리지 않는다. 노인의 기억이니 따라잡지 못해 허덕일 만큼 빠르지도 않다. 시한폭탄에 붙어 있는 카운트다운 숫자판처럼 일상적이고 일정한 속도로 치고 나간다. 이 속도에 쉽게 동기화가 되어, 어느덧 나는 살인을 했고 치매에 걸려 내 기억을 한 꺼풀씩 벗겨내기 시작한다. 중요하고 치명적인 뭔가를 잊은 것은 아닌지 자꾸 불안한 시선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의혹과 두려움 가득한 눈초리로 주변 사람을 힐끗힐끗 쳐다보기도 한다. 술술 읽히는 문장과 빠른 전개의 덫에 걸린 것이다.

 

이렇게 술술 읽히다니, 작가가 이 소설을 쓰기 위해 오래 고민하지도 기획하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 눈에 티끌 하나 들어 간 듯, 딱 그만한 크기의 아이디어가 그의 뇌리에 떨어졌고, 그것의 압축이 술술 풀어지면서 모르긴 해도 한나절, 길어야 하룻밤을 더하여 쉬지도 않고 백스페이스 한 번 누르지 않고 휘리릭 쓰고는 교정도 없이 탈고했을 것이라고 상상했다. 그만큼 이 소설은 내용으로나 문장으로나 구성으로나 단단하면서도 잘 흐른다. 그러나 세상에 그렇게 술술 써지는 소설이 어디 있을까.

 

작가의 말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번 소설은 유난히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아 애를 먹었다. 하루에 한두 문장씩밖에는 쓰지 못한 날이 많았다."

 

몹시도 미안하고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목 넘김이 부드러운 위스키 한 잔, 코끝을 스치는 순수한 향수 한 방울을 얻기 위해 얼마나 다양하고 많은 재료가 쓰여지는가. 발효와 숙성을 위해 기다린 날들과 거르고 추출하는 수고, 마침내 한 병의 목적물을 얻은 다음 까맣게 잊혀지는 훨씬 많은 것들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살인+기억+노인+치매, 신선하지도 맛있어 보이지도 않는 재료들이다. 그런데, 첫 문장을 읽자마자 나는 끊임 없이 이야기를 먹고 먹고 또 먹는다. 어느덧 깊이 중독된 나를 발견하게 된다. 멋진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