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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보다

[책] 화이트 팽 - 잭 런던

러기- 2019. 1. 23. 19:09



화이트 팽 (하얀 송곳니) - 잭 런던

소설 1906

White Fang by Jack London



여기 늑대개 한 마리가 있다.

늑대개란 늑대와 개 사이에서 태어난 동물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잠깐, 그런데 왜 늑대개지? 개늑대는 안되고? 늑대개(wolfdog)가 개늑대(dogwolf) 보다 발음이 편한가? 기분 탓인가?

명사인 '개'와 '늑대'를 더해서 새로운 이름을 만들면, 앞에 오는 이름은 성격이나 종류 따위로 꾸밈역할을 하고, 뒤에 오는 이름이 몸뚱이가 된다. 즉, '늑대개'는 늑대와 개 사이에서 난 개가 되는 것이고, '개늑대'는 개와 늑대 사이에서 난 늑대를 말하는 셈이다.

아니, 이게 뭔 늑대개 같은 소리인가. 그럼 파랑을 녹색에 섞으면 청록이고, 녹색을 파랑에 섞으면 녹청이란 말인가? 그게 다르다고?

하나는 늑대이고 하나는 개니까,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생물학적으로는 같은 종이다. 다만, 신분이 다르다고나 할까. 늑대개라고 부를 때는 인간의 사회에 들어와 인간에게 길들여지는 조건으로 인간으로 부터 보호와 공급을 보장 받기로 계약한 동물로서, 개로 여겨진다. 개늑대는 야생에서 늑대 무리와 어울리고 다투며 사는 동물로서, 간단히 말해 늑대다. 자신이 개라 불리든, 늑대라 불리든 관심 밖이다. 

둘은 같은 종이지만 성격과 기질, 사회성이 확연히 다르다. 개가 늑대로 신분을 바꾸는 경우는 간혹 있지만, 늑대가 개로 신분을 바꾸는 것은 매우 어렵다. 말이 통하는 인간 끼리 계약을 맺는 것도 어려운데, 말도 통하지 않는 늑대와 인간이 계약을 맺는 것이 얼마나 어렵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여기 늑대개 한 마리가 있다.'는 말은 정정해야 겠다.

여기 개늑대 한 마리가 있다.
어미는 늑대와 개 사이에서 나서 한 때 인간에게 길들여졌다가 야생으로 달아난 개늑대이고, 아비는 야생에서 산전수전 다 겪으며 경쟁자를 물리치고 홀로 살아 남은 회색늑대이다. 다섯이 함께 태어났으나, 심각한 기근을 지나면서 다 죽고 혼자 남았다. 모질고 가혹한 먹이싸움에서 아비마저 잃고 어미와 함께 겨우 기근을 버티어낸다. 과거에 인연이 있던 인디언 마을을 만나자 기근에 고통이 심했던 어미는 새끼와 함께 인간사회에 투항한다. 

이곳에서 새끼 개늑대는 주인이 된 그레이 비버로 부터 화이트 팽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인간사회라고 해서 모두가 문명적 질서 아래 평화롭게 사는 것은 아니었다. 인디언 마을에 있는 수 많은 개들 사회에서 화이트 팽은 철저하게 따돌려지고 오히려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개들의 공격으로 부터 목숨을 지키기 위해 사납고 교활한 늑대의 성질이 발전하는 한 편, 주인으로 부터는 개로서의 사회성을 훈련 받으며 자란다. 한 마디로, 어린 개늑대에서 사납고 강한 늑대개로 성장해간다.   

어느덧 여느 개와도 견줄 수 없는 강인하고 충성스런 늑대개로 성장하여 주인의 사랑과 신뢰를 얻지만, 인디언 그레이 비버의 어리석은 판단으로 화이트 팽은 투견으로 팔려버린다. 믿었던 주인의 배신과 새로운 주인의 야만스럽고 교활한 훈련으로 화이트 팽은 자신의 송곳니 만큼이나 날카롭고 사납게 변해간다. 그러던 중 투견장에서 목숨을 잃을 위기에 빠졌을 때, 운명과도 같이 새로운 주인을 만나 산타클라라 까지 내려 온다. 더 이상 야성이 허락 되지 않는 곳, 완전한 문명사회에서 화이트 팽은 새로운 삶의 방식과 사회성을 익혀간다.  

이 책은 같은 작가의 전작인 [야성의 부름]과 함께 늘 합본으로 나온다. 혼동을 피하고 이야기에 대한 신선한 느낌을 맛보기 위해 [야성의 부름]과는 시간 간격을 두고 읽었다. 그럼에도, 자꾸만 [야성의 부름]이 생각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클론다이크에서 어쩌면 벅과 한 번쯤은 마주치지 않았을까? 벅과 화이트 팽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 이런 유치하고 단순한 생각을 어떻게 피할 수 있단 말인가. 

[야성의 부름]의 벅이 따듯한 남쪽 나라 산타클라라에서 나와 클론 다이크를 거쳐 야생으로 사라져 버린 것과 반대로, 화이트 팽은 야생에서 클론다이크를 거쳐 따듯한 남쪽 나라 산타클라라로 들어 왔다. 개에서 늑대로, 늑대에서 개로, 문명에서 야생으로, 야생에서 문명으로, 두 소설은 완벽한 데칼코마니를 이루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이야기가 진부하거나 뻔하게 여겨지진 않았다. 

인간에게 길들여진 개가 야생으로 가는 과정은 일면 자연스럽게 보이기도 한다. 먼 조상이라는 늑대의 기질이 드러나면서 스스로 생존을 다투는 야생에 적응해 나갈 수 있다. 머나먼 알라스카 까지 갈 것도 없이 오늘날 도심에도 버려진 개들이 야생에서 스스로 삶을 이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은가. 하지만 야생에서 자라난 늑대가 인간에게 길들여지기란 매우 어렵다. 굳이 해야 한다면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가혹하고 지리한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화이트 팽은 전작인 [야성의 부름] 보다도 훨씬 더 가혹하고 관용이 없는 야성을 묘사하고 있다. 그 야성이라는 것이 야생에만 있는 것은 아니고, 바로 인간사회에 내재해 있다는 점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책의 제목에 관한 짧은 생각*
'화이트 팽' 혹은 '하얀 송곳니'

처음 만난 어린 새끼 개늑대가 하얀 송곳니를 내밀며 으르렁 거리자, 인디언이 이렇게 외친다. "와밤 와비스카 이프 피트타!" 네? 뭐라구요? 다행이도 우리말 번역이 괄호로 나와 있다. "이것 봐, 송곳니가 하얗군!" 그리고 그의 주인이 된 그레이 비버가 이렇게 말한다. "송곳니가 굉장히 하얀데? 녀석 이름은 하얀 송곳니, 화이트 팽이 좋겠군."

인디언들의 이름 짓는 방식은 자연적이고 직접적인 묘사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늑대와 춤을'이라는 영화에서 보면 인디언들의 이름이 '발로 차는 새', '주먹 쥐고 일어서', '머리에 부는 바람', '열마리 곰' 

영어로 쓰여진 소설이므로, 화이트 팽 (white pang)이라는 이름도 직접적인 묘사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영어로 말할 때의 이야기이다. 우리말 번역을 할 때는 '하얀 송곳니'라고 불러 주는 것이 인디언식 이름짓기의 특징 살려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처음 번역되었을 때는 '하얀 송곳니'라는 제목이었던 것 같은데, 요즘은 '화이트 팽'이 더 많이 알려진 제목이 되었다.